13세기까지 포르투갈 지도층은 군사 귀족이었다. 아랍의 기마 군사 귀족들과 싸워야 하니 지도층은 무조건 기사나 군지휘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아랍 세력이 그라나다를 제외한 모든 곳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에서 상업 세력의 발언권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에서 상업 세력은 일반적인 시민 상인이 주 측이라기보다 상업에 우호적인 귀족들이 주 측이 되었다. 이들은 사하라 사막 남부에서 카라반이 실어오는 향신료 중개무역이나 대서양의 엄청난 수산자원, 전쟁에서 내정으로 눈을 돌리는 포르투갈 내부 경제 등을 기반으로 삼았다.(상업 귀족이라고 하지만, 이들도 군사지휘관이자 이슬람과의 적개심이 존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포르투갈 지도층은 상업 귀족들이 상당수 차지하고 이들의 목표가 하나 정해졌다. 바로 모로코 정벌이다.
모로코, 우리나라에는 스페인 지브롤터에서 하는 당일치기 관광이나, 코발트빛 마을 정도로 많이 알고 있다. 당시로서는 북아프리카의 맹주국이었다. 이베리아 반도를 정벌한 유목민들이 거쳐왔던 곳이니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국가들은 저놈들이 언제가 힘을 합쳐 다시 공격해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물론 이곳 말고도 사하라 카라반 교역의 독점 및 상업 중심지이던 지중해 내해와의 교역망 확보를 위해 모로코의 항구도시 강탈도 경제적 측면에서 장점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포르투갈인들은 모로코 정벌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사이에는 바다가 있다. 포르투갈이 모로코를 공격하려면 대부대를 수송하는 방법밖에 없다. 바다라는 자연스러운 방패 때문에 단순한 방법으로는 정벌이 쉽지 않았다. 모로코 정벌을 위해 열을 올리고 있을 시기에 엔리케 왕자가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선구자적인 혜안으로 포르투갈의 해상 진출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다. 엔리케 왕자 혼자서 쌩둥 맞게 돈을 투자하여 해상진출을 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린 상태에서 당시 엔리케 왕자가 총대를 매고 국가적 프로젝트인 해상진출을 단행했다고 한다. 대략 이 시기에 페니키아 인들이 아프리카 서해안을 지나 남해안을 지나 동해안을 돌아서 지금의 이집트 쪽으로 돌아왔다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카라반 대상들에 의해서 모로코 밑 사막 국가들이 어느 정도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행된 해상진출. 처음에는 카보베르데나 그 근방에서 몇 년씩 헛발만 디디기도 했다. 소수의 카라반 대상들이 포르투갈 왕정에 진출하여 통역 겸 중개인 역할을 하면서 프로젝트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포르투갈 본토는 심기일전하여 모로코의 세우타를 정복하게 되었다. 이후에 포르투갈의 지상목표는 두 가지로 분화했다. 1. 아프리카 서쪽 국가들을 포섭 또는 정복하거나 모로코 페즈 지방을 공략하여 세우타를 근거지로 한 포르투갈 주공의 역할을 돕는 것 2. 탐험을 계속하며 향신료 산지를 찾는 것이다.
아프리카 서쪽에서 나는 상아, 금, 토착 향신료는 큰 수입이 나지 않았다. 더욱 남쪽으로 가면서 남아프리카를 보게 되었다. 그 이후 동아프리카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동아프리카에서는 원시 아프리카 부족들이 아니라 대상인들이 거주하는 인구 10만 정도의 대도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동아프리카는 토속신앙이 우세하나 이슬람 국가들의 확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아 프라카는 아라비아반도와 뱅갈, 서인도, 인도 동남부, 동남아와 중국 남부를 잇는 거대한 무역 라인의 한쪽 끝으로서 엄청난 성황을 누리고 있었다.
포르투갈이 동아프리카에 진출했을 때, 이미 무역망이 발달하고 대도시가 존재했다고 말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답은 무역풍에 있다.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서 몇 개월간 바람의 방향이 일정하고 이를 이용하면 동아프리카에서 인도까지, 인도에서 동남아시아까지 쉽게 갈 수 있었다. 무역풍과 계절풍의 존재는 서기 1천 년 전에 발견되어 고정적으로 이용된 게 확실한데, 초창기에는 뱃사람들이 시험 삼아 배를 몰아보다가 대륙간 이동을 성공시켰을 것이고, 이게 확실한 무역루트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당시의 무역망을 정리해보겠다.
동아프리카 말린디, 잔지바르, 모가디슈 - 향료, 향신료, 화폐로 쓰이는 따개비, 상아, 금
아라비아 반도의 무스카트로 대표되는 오만의 무역도시들 - 향료, 염료
벵갈의 무굴제국령 - 직물, 염료, 향신료 등
인도 서부의 캘리컷 - 후추, 보석, 직물, 염료 등
인도 남부의 실론 - 향신료, 보석
동남아시아의 팔렘방, 자카르타섬, 브루나이섬 남부 - 육두구 등 향신료
태국, 베트남 - 지역 특산품 등(이곳은 거쳐가는 곳의 의미가 더 크다)
중국 남부 - 거의 모든 것들
대표적인 교역품과 대표적인 도시에 대해서만 언급하였지만, 당연히 수많은 중간 기항지와 수많은 물품들이 존재했다. 이렇게 고도화된 무역망은 엄청난 부를 창출했다. 이 무역망은 국가 주도로 운영되기보다 수만은 상인들이 지역별, 도시별로 모여서 이루어졌고, 소상인들은 현재의 어선 크기 정도의 다우 1~2척을 운영했고 대상인들은 무역 함대나 도시별, 지역별, 국가별로 건조한 함선을 이끌고 무역을 했다.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벗어나 이러한 무역망을 발견했고 여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포르투갈은 동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시아를 침략하거나 지배하거나 식민지를 세울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포르투갈의 인구 수와 모로코와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포르투갈의 인구는 최대 120만 명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남자 60만 명과 군사와 선원으로 뽑을 수 있는 인구가 10만 명이라고 생각해보자. 우리나라로 생각해본다면 5000만 인구 중에 500만 명이 군인인 것이다. 즉 포르투갈의 적인 인구수는 대항해시대 내내 한계로 남았다.
또한, 모로코와의 관계는 이미 생사를 건 상태였다. 포르투갈이 항해에 투자한 이유는 모로코와 공략이 한몫했다고 말했었다. 1415년에 포르투갈이 겨우 세우타를 정복한 이후, 서아프리카를 통해 모로코 정복을 꾸준히 시도하였다. 하지만, 서아프리카에 직접 가보니 서아프리카는 여러 나라로 쪼개져있어서 사하라 사막을 넘어 모로코와 붙을만한 국가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서아프리카에서 제일 강한 송가이는 1400년 중후반쯤 모로코와의 전쟁에서 완패하였다. 모로코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송가이 북부까지 정복하지만, 보급로 확보와 내부 분쟁 등 올 철군하고 송가이도는 멸망 후 분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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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포르투갈은 세우타에 자국의 최정예 7000~10000을 배치해야 했고, 보급 겸 지중해 무역 함대도 배치해야 했다. 1500년대로 가면서 오스만이 북아프리카에 손을 뻗고,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이 통합되어 갱 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해적 함대가 언제 모로코에 고용되어 세우타 봉쇄에 나서거나 포르투갈의 지중해 무역을 방해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포르투갈은 여기에 꾸준히 신경을 써야 했다.
포르투갈의 군사적 상황을 정리해보면
1. 포르투갈 주둔군 - 스페인과의 경계도 필요하고, 톨레도 서쪽의 지방을 기준으로 국경분쟁을 일으키는 사이라와도 대치할 필요가 있었다. 거기에 카스티야가 아라곤과 합세하고 이베리아 반도 대다수와 이탈리아, 그리스까지 아우른 느 거대 국가가 되자 필요성이 높아졌다.
2. 세우타 방위 - 북아프리카 해적과 모로코 군대를 막기 위한 정예군 7000~10000만 군대
3. 서아프리카 거점들 - 유럽에서 출발해 전투력을 유지하며 동아프리카까지 간다는 건 당시로는 어려웠다. 특히나, 적도를 넘아가는 지점에서 포르투갈 함대를 위한 휴식을 위해 중간 기착지들이 필요했다.
4. 서쪽 탐험 함대 - 1492년 서인도제도 발견 이후, 포르투갈도 여기에 일부 편승하였다. 인력부족을 깨닫고 브라질에 만족했지만, 브라질 개발과 여기소 나오는 이득을 수송할 함대가 필요했다.
5. 동아프리카 개척 함대 - 거대한 무역망에 속하는 것은 포르투갈의 국가적 대사였다. 무조건적인 성과가 필요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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