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인도양 방면 함대는 거대 무역망의 한쪽 축을 점령하고 지배하는 도박을 하기보다는 무역망에 편승하여 이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포르투갈은 몇몇 항구 도시를 점령하거나, 매수하건, 도시의 유력자들과 협상하여 성채를 쌓고 상관을 지었다. 이것은 포르투갈의 거점이 되었다. 이렇게 포르투갈이 지역마다 소수의 거점을 짓고 거점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고 함대를 굴리는 것을 '거점 무역'이라고 했다. 포르투갈의 주요 거점은 서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인도에 존재했으며 동남아와 중국은 주요 목표가 아니었다. 물론 마카오가 있지만 포르투갈의 주요 돈줄은 아프리카랑 인도였다.
포르투갈이 거점을 지으면서 생각해보니 거대 무역망에서 포르투갈 함대의 힘은 별거 아니지만, 지역별로 그리고 도시별로 나뉜 상인들과 비교하자면 엄청나게 강하다는 걸 깨닫는 다. 포르투갈이 거점을 짓고 무역활동을 하긴 하지만, 아랍 상인이나 아프리카의 토속인들, 인도의 힌두교도, 실론의 불교 상인들은 정말 순수한 상인 그 자체인데 비해, 포르투갈은 무장병력과 화포를 실은 군사 함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무력으로 초반에 많은 이득을 취하였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포르투갈 함대가 주둔한다는 소문이 알려지면 지방 무역량이 일순간 동결됐고 포르투갈에게 손해로 다가왔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무력을 사용하는 대신 통행세 걷기로 전략을 바꾸었다. 각 거점 또는 해상에서 포르투갈에게 통행세를 납부하면 통행증을 발부했고 안전 운행을 증명하는 패스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전략이 성공적이어서 포르투갈이 무역망에서 얻는 이익은 매우 커졌다.
포르투갈의 통행세 수금은 상인들의 순이익을 저해했고 이에 따라 지역 지배자의 세금도 줄어들었다. 물론 이걸 두고만 볼 사람이 어디 있었을까. 무굴 황제는 성지 순례를 가던 자신의 딸이 포르투갈의 함대에 당하자 함대를 급파하여 포르투갈의 함대를 공격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도 자체적으로 함대를 마련해서 포르투갈과 한 판 붙었다. 결과는 포르투갈의 승리였다. 포르투갈 함대는 바닷길이 거센 희망봉을 화포를 싣고 지날 정도로 항해술이 발달했고 무기 또한 그러했다. 엔리케 왕자가 해양대학을 지은 후 국가 주도 연구개발의 산물이었고 여기에 무굴이나 아라비아 반도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큰 어려움 없이 이들을 제압하고 통행세 사업과 무역에서 이득을 취했다.
여기서 강조할 점이 하나 있다. 지금까지 포르투갈의 행동은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세계가 연결되었다'가 아니라 이미 무역망은 존재했고 포르투갈은 거기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다른 해적이 없던 것도 아니고 지역 간 경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포르투갈의 등장은 새로운 무력 세력의 등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동아프리카에 진출하여 거점 무역을 통해 무역망에 참여하고, 유럽까지 무역망을 확대시켰다고 보는 게 옳다.
이렇게 부를 축적하며 포르투갈 함대가 번 수익은 고스란히 포르투갈 본토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주앙 3세는 각종 제도 등을 개선했고 포르투갈은 발전했다. 그러나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포르투갈 인구가 120만 명이라고 했었다. 포르투갈이 급진적으로 해상진출을 하던 16세기에 선원일을 하다 죽은 성인 남성의 수는 약 3~4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 수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런데도 해외에서 벌어오는 수익에 열광하며 포르투갈 남자들은 배를 타서 한탕하기를 소망했다. 포르투갈 내부는 성인 남자의 유출로 생산성이 약화되고 농촌은 황폐화되었다. 하지만 버틸 만은 했다. 인도에서 벌어온 수익으로 식량을 비싼 값에 수입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운명이 다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세바스티안 왕의 등장이다. 주앙 3세의 손자로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그는 종교에 대한 열의와 정복욕, 야망이 가득했다. 포르투갈은 국력을 총동원하여 모로코를 치고 북아프리카 서부를 영토에 편입시킴으로써 포르투갈의 세력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세우타 주둔군에 왕실 근위군에 동방 함대가 긁어온 금으로 고용한 용병을 모조리 동원하여 모로코 내륙으로 진군했다. 규모는 1만 5천 ~ 1만 7천쯤 됐다. 모로코도 총동원령을 내리고 1578년에 제대로 붙었다. 이것이 '알 카사르 알 카사바 전투'라 기록한다.
포르투갈 군은 보급로와 퇴각로를 잘 살피지 않고 무리하게 진군했다. 반면 아랍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밀려났다고 해도 모로코의 사막에서는 아직까지 유목민의 기병들의 위력이 상당했다. 말과 낙타를 타고 포르투갈 군대를 포위한 모로코 기병을 주축으로 모로코 군은 포르투갈 군대를 섬멸했다. 모로코는 전투 중에 왕이 사망했음에도 동생이 왕권과 군사권을 이어받아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세바스티안은 전사하고 포르투갈은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포르투갈은 이후 왕권 계승자가 단절되자 내분을 일으키다가 스페인의 필리페 2세에게 1580년에 정복당한다. 그리고 해외 함대와 거점들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포르투갈은 60년 후에, 스페인 군대가 30년 전쟁에서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에 묶여있을 때를 공략하여 독립을 이루지만 이미 국력은 약화되어 있었다.
결국, 소수의 거점만 지키면서 무역을 하다가 동남아에서는 네덜란드에 밀리고 그 외의 지방에서 영국에게 밀리면서 캘리컷을 영국에 건네는 대가로 해외 무역에서 영국의 비호를 받게 된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황금기는 끝이 난다. 이후에 포르투갈은 한창 개발 중이던 브라질에 투자하며 브라질과의 동반성장을 꾀하지만 2류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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